캔사스, 미국의 정 중앙.. 노예제 대립의 현장
- 김용일 기자
- 4월 25일
- 3분 분량

1856년 5월22일 오후 미연방 상원회의장.
매사추세츠주 출신 찰스 섬너(Charles Sumner)상원의원이 머리가 피투성이가 돼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가해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프레스턴 브룩스(Preston Brooks) 연방하원의원.
백주 대낮에 그것도 연방의회 회의장에서, 의원의 의원에 대한 유혈 폭력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브룩스 의원이 머리 부분에 금속장식이 있는 이 지팡이로 어찌나 모질게 두드려 팼는 지, 섬너 의원은 유혈이 낭자한 채 의식을 잃었고 이후 3년이 지나서야 정상적으로 상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의 노예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 의회 폭행 사건은 ‘유혈의 캔사스(Bleeding Kansas)’로 불리는, 일련의 노예제 관련 폭력 사태를 상징하는 전형이 됐고 몇 년 뒤 발발한 남북전쟁을 예고한 ‘오멘(Omen)’이기도 했다.
미헌정사상 초유의 폭행 사태를 빚게 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캔사스주 였다. 캔사스는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 부터 사들인 루이지애나에 속해 있던 땅으로 미국의 ‘지리적인 배꼽’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실제로 캔사스는 미 대륙의 가장 정 중앙에 위치한 내륙 주다.
면적 213,096 km2로, 거의 한반도 크기만 하며 중서부의 대평원지대에 속해 있다. 지천으로 너른 초원을 가지고 있기에 각지의 목동들이 소떼를 몰고 올 때 중간 기착지로 삼는 평화로운 ‘소몰이 골’ 동네였다.
하지만1861년 34번째 주로 연방에 가입하긴 했지만, 캔사스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심상치 않은 내홍의 조짐을 안고 있었다. 준주에 머물러 있던 캔사스가 정식 주로 승격돼 연방의 일원이 돼는 데 있어 ‘노예주’와 ‘자유주’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느냐가 주된 이슈였다.
결과적으로 캔사스는 자유주로 출범했지만 이 과정에서 여론이 갈리고 양측간에 ‘피의 공격과 보복’이 잇따르며 60여명이 목숨을 잃는, 연방의회 폭행 사건을 포함한 ‘브리딩 캔사스’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캔사스는 말 그대로 평평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래서 방목과 밀, 옥수수, 보리 등의 대표적인 경작지이기도 하다. 특히 캔사스에서 많이 재배되는 겨울 밀은 가을에 씨가 뿌려지고 초여름에 수확되는 데 한 여름의 열기와 병충해를 피할 수 있어 밀 생산량을 크게 늘리게 했다.캔사스를 미국의 ‘곡창 지대’로 불리게 만든 효자 상품이기도 하다.
그 당시 중서부의 주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 처럼 캔사스도 인구가 희박한, 덩그러니 땅만 넓은 평원지대의 한촌(閑村)이었다. 그러나 1840년 부터 미대륙횡단 철도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오지(奧地)에 불과하던 캔사스에도 개발의 서광이 찾아 들었다.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은 당시 미연방정부의 국책사업이었다. 중부에 이어 서부 개척,그리고 미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육상 물류망 확보를 위해 절대적으로 긴요한 인프라 구축이었다.
그래서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주정부나 상하원 정치인들은 저마다 기 지역에 역(驛) 을 유치하기 위한 로비에 혈안이 돼 있었다. 한국의 고속철도 건설 때 관할내에 중간 기착역을 두기위해 지방자치 정부나 정치인,그리고 주민들이 치열한 유치전을 벌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횡단열차가 동부에서 종착지인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려면 황무지 상태에 있던 캔사스, 네브라스카 지역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대의 구간 길이는 전체 노선의 20% 이상이 될 만큼 그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연방정부는 이에 따라 1854년 캔사스와 네브라스카를 준주로 승격시키고 본격적인 개발을 추진했다. 당시 독립 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략 인구수가 6만명 이상에 달해야 했다. 허허벌판과 다름 없던 캔사스에 정착민들의 이주가 급증했고, 지하자원과 농축산업 개발에 대한 투자도 늘면서 186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명을 넘는 버젓한 주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다.
캔사스의 핵심 산업은 농축산업이다. 주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 농장지대로 구성돼 있다.밀 생산 외에도 육우 및 낙농 제품 생산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점하고있다. 19세기 말엽 부터는 석유가 발견되면서 붐이 일었다.기존의 석탄,아연 생산에 이어 석유 ,천연가스 개발이 주의 경제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게 됐다.
캔사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역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주요한 군수산업 보급 기지 역할을 하면서 다시금 재부흥기를 맞았다.
주가 태동될 당시 노예제를 둘러싸고 내란(?) 끝에 반 노예 노선을 취했고 남북전쟁 때도 북군의 일원으로 기여했지만, 캔사스는 전형적인 남부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인 성향도 ‘살리드 레드(Solid Red)’, 즉 ‘찐 보수’의 색깔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1988년 대선 이래 줄 곧 공화당 후보만을 승자로 만들어 줬다. 2석의 연방 상원의원 자리도 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주변 주들이 더러 ‘스윙 스테이트 ‘경향 을 보이며 변모하는 데 반해 거의 외골수로 보수를 고수하고 있다. 캔사스의 주도는 토피가 지만 최대 도시는 캔사스 시티다. 그러나 캔사스 시티의 경우 미주리와 주 경계가 중간에 지나는 분단 도시 처럼 돼 있이 사실상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 자체가 워낙 대평원 같은 곳이라 오클라호마 등과 더불어 토네이도 피해를 자주 입는 곳이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수은주가 영하 20도대 안팎으로 곤두박질 치기도 한다. 간판 대학으로는 미식축구로 유명한 캔사스 주립대학교가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