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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네티컷, 미국 건국의 정신적 지주 역할

김용일 기자

뉴욕주에 바로 인접한 코네티컷주는 미국 내에서도 제일 작은 주에 속한다. 전체 면적이 14,371㎢로 전라남도보다 약간 큰 정도이다. 평균 해발고도는 152m로, 주 전체가 거의 구릉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코네티컷 식민지는 그러나 독립전쟁 무렵에는 매사추세츠와 더불어 대영 항쟁의 선도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큰 전투는 매사추세츠, 뉴욕 및 버지니아 등 주요 지역에서 전개됐지만, 코네티컷 역시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면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대서양에 접해 일찍부터 바다에 익숙했던 코네티컷은 독립전쟁 중에 특히 해군의 역할을 수행했다. 1600년대 후반에 이미 서인도 제도에 농작물을 수출할 만큼 조선 기술과 해상 운송에 상당한 역량을 구축하고 있었다.


코네티컷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등과 더불어 미합중국 건국에 있어 정치적인 ‘뼈대’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식민지에서 주로 승격된 13개 주는 미합중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했다. 주의 크기나 인구, 독립전쟁에서의 기여도 및 정치 성향, 산업 기반 등이 모두 달랐기에 추구하는 목표에도 차이가 있었다.


가장 민감한 정치적 대표성 다툼에 있어, 규모가 큰 주들은 인구수 기준으로 주민 대표를 뽑아 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코네티컷, 뉴햄프셔, 로드아일랜드 등 덩치가 작은 주들은 인구나 크기에 관계없이 주마다 동일한 대표성을 갖는 체제를 원했다.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상하 양원 체제이다. 상원은 주의 크기와 관계없이 2명씩 대표를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수에 비례해 대표 수를 결정하기로 했다. 아울러 각 주의 노예에 대한 입장도 달라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노예주’와 반대하는 ‘자유주’ 간에 동수로 균형을 맞추기로 했다. 코네티컷은 당연히 자유주의 일원이 됐다.


코네티컷은 다양한 산업 기반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이 군함 건조 및 방위 산업이다. 그로튼 하이츠 전투가 발생한 그로튼은 바로 그 중심지이다. 미국 정부는 1910년 코네티컷주 뉴런던에 일반대학과 군사대학을 겸하는 미국 연안경비대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미국 해양연안 경비의 본부가 바로 코네티컷이다.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 코네티컷의 군사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무기 및 비행기 부품, 헬리콥터 등과 같은 각종 군수품 공장이 코네티컷에서 가동됐다. 1872년에 미국 해군이 잠수함 기지를 세운 이래, 1916년부터 그로튼은 공식적으로 미국 최대의 잠수함 기지로 자리잡았다. 1954년에는 미국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이곳에서 진수됐다.


코네티컷은 미국 내에서 제일 잘 사는 주로 꼽힌다. 주민 평균소득 수준이 미국 50개 주 가운데 언제나 1~3위 안에 든다. 지금은 방위 산업 외에 컴퓨터, 보험 및 금융 산업도 주 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코네티컷은 또 매사추세츠처럼 대학과 교육 분야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명문 예일 대학이 뉴헤이븐에 소재하고 있고, 웨슬리안 대학과 명문 리버럴 아츠 컬리지(학부전문대학)인 트리니티 컬리지 등도 코네티컷을 대표하는 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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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물로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코네티컷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자신이 주지사를 지냈던 텍사스로 본거지를 옮겼다. 코네티컷의 정치적 성향은 매사추세츠와 함께 민주당 성향의 블루 스테이트이다.

백인 비율이 75% 정도로 미국 내 평균보다 훨씬 높지만, 진보세가 매우 강한 편이다. 과거 닉슨에서 부시 대통령까지는 공화당이 차지했었지만, 1992년 클린턴 당선 이후 지금까지 민주당 후보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켰다.


마크 트웨인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실망할 것이다 ……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코네티컷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명언록 가운데 하나다. 마크 트웨인은 유명한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다. 그러나 사실 마크 트웨인은 필명이며, 실명은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마크 트웨인은 1835년 미주리주에서 출생했지만, 어린 시절만 그곳에서 보냈을 뿐 주로 활동한 무대는 코네티컷이었다.


한국에서는 마크 트웨인이 아동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일찍부터 여성참정권을 주장하고 소수자에게 동정적인 휴머니스트였다. 동시에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촌철살인의 직관을 표현하는 풍자 문학의 대가였으며,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마크 트웨인의 문학은 180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했으며 당시 미국의 시대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작가로서 유명세 덕에 ‘셀럽’ 반열에 올라 있던 마크 트웨인은 풍자를 넘어 독설에 가까운 비평으로 더 유명했다. 정치적으로는 계몽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의 필리핀 침공을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명을 받은 것이라고 정당화했던 당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을 “정치계의 톰 소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정치와 종교, 사회 이슈 등에 대해 경계를 가리지 않고 허구와 위선을 통렬한 비판으로 꼬집는 탓에 그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교회 등 주류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한번은 신문 칼럼에 미국 정치의 부패상을 비난하면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항의가 잇따르고 고소를 당할 상황이 되자, 사과문으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라고 문구를 수정해 게재했다. “아니다”라는 말로 해명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항의자들에게 더 큰 모욕을 안긴 통렬한 풍자로 인용되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마크 트웨인은 영토 확장과 국력 팽창으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며 커가는 19세기 미국을 다른 관점에서 진단하고 비평하고자 했다. 그런 작가적 양심과 비판 정신을 문학과 비평을 통해 가감 없이 표출했다.


그의 저서 《도금 시대(Gilded Age)가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는 당시 미국이 석유왕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 등 전설적인 기업가들의 등장과 함께 비약적인 산업 발전을 구가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 착취, 빈부 확대 등과 같은 사회적 소외와 그늘도 짙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사회 내면의 온갖 병소(病巢)들이 번영이라는 외화(外華)로 뒤덮인, 그래서 마치 도금(淘金)한 것 같은 사회라는 비판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그의 이 같은 통렬한 통찰은 19세기 미국 사회가 양적 팽창에 함몰되지 않고 질적으로도 업그레이드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활동 무대였던 코네티컷에 한정되지 않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미국의 양심’으로 칭송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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