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50개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미국 각 주는 크기와 규모, 경제력, 인구 등에 있어 웬만한 국가를 능가하는 곳들이 많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50개주의 면면 들을 주별로 소개해 본다.
앨라배마주를 두고 흔히 ‘하트 오브 딕시(Heart of Dixie)’라 부른다. ‘남부의 한가운데’라는 뜻이다. 지리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이들의 관점이나 사고방식을 거칠게 표현해 ‘꼴통’ 남부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앨라배마는 좌로는 미시시피, 위로 테네시, 우로는 조지아, 아래로는 플로리다 등 사실상 남부 주들에 포위돼 있는 형국이다. 남쪽 일부가 숨통을 틔우듯이 멕시코만에 연해 있을 뿐이다.
앨라매마주의 태동은 남부 주변 주들과 비슷한 경로를 거쳤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이곳 역시 원래 인디언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에 프랑스 탐사자들이 거치면서 내륙 쪽 대부분은 프랑스령 간판을 달았다. 그러다가 영국에 밀려 영국령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미국 영토가 됐다. 그러나 멕시코만에 접한 대부분 남부 지역은 애초부터 주인이 달랐다. 플로리다를 장악한 스페인이 이 일대까지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는 나중에 준주를 거쳐 1819년 22번째 주로 합중국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영토 정리가 끝났다. 이처럼 앨라배마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라는 3국의 각축전 끝에 미국으로 낙착된 ‘영토 풍파’를 심하게 겪은 곳이다.
앨라배마는 유럽 열강의 영토 쟁탈전 외에 원주민 인디언들과도 거세게 부딪혔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역 정착민들 수백 명이 크리크족 인디언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나중에 미국 땅이 된 후에도 연방군까지 출동해 인디언 대부분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밀어내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복잡하게 얽혔던 곳이기에 앨라배마는 지역별로도 다소간 차이가 난다. 내륙 쪽이 영국이나 프랑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면, 남쪽 해안 지역은 스페인풍이 강하다.
위도상 한국의 제주도와 비슷한 앨라배마는 온난 습윤의 전형적인 아열대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또 주변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넓은 평원 지대가 태반이다. 이런 기후와 지형적 특성으로 면화나 담배나 밀 등과 같은 작물 재배가 활발하다. 대규모 플랜테이션과 그에 속한 많은 노예의 노동력으로 운영되었던, 농업 중심의 경제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남부 특성’을 토대로 앨라배마는 전형적인 ‘남부의 길’을 걸어왔다. 남북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861년 1월 11일에 합중국으로부터 탈퇴해 남부연합을 설립했다. 2월에는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가 남부연합의 수도가 됐다. 3개월 뒤 버지니아 리치몬드로 옮겨지기 전까지 남부군의 본거지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앨라배마의 남군이 1864년의 모빌만 해전에서 대패한 뒤 곳곳이 북군에 의해 파괴당했다. 앨라배마는 남부 최대 공업 지대 중의 하나였기에 철강 등 산업시설들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셀마에 있는 군수품 산업들은 거의 초토화됐고, 북군의 진군 과정에서 앨라배마 대학까지 불에 타기도 했다.
전쟁 종료 후 3년 뒤 앨라배마는 다시금 합중국으로 재편입됐으나 패전의 상흔은 고스란히 남았다. 앨라배마는 미국 내 목화 생산이 가장 많아 ‘면화 주(Cotton state)’로 불리기도 했었는데, 모든 노예의 해방과 함께 자작농 백인 농부들의 몰락 등으로 인해 특히 농업 부문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남부의 피츠버그’로 불릴 만큼 철강 산업이 발달했고, 조선업 등을 중심으로 제1차세계대전 때 상당한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는 그동안 중추 역할을 했던 제조업, 중공업 부문이 동시에 와해하는 바람에 주 내 60개 이상의 은행이 문을 닫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다시금 활기를 회복했던 앨라배마 경제는 근래 들어 완전히 새로운 버전으로 부활했다. 주도 몽고메리에 현대자동차가 진출한 것을 필두로 헌츠빌에도 도요타 그리고 혼다, 벤츠의 생산 공장들이 속속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자동차 생산량이 미시간 디트로이트를 앞설 정도로 앨라배마는 새로운 자동차 산업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앨라배마 외에 조지아 등에도 세계 유수의 자동차 생산 공장과 부품 업체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제 남부는 더 이상 목가적인 ‘면화 벨트(Cotton Belt)’가 아니라 ‘자동차 벨트(Auto Belt)’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얻고 있다.
남한 땅의 1.5배쯤 되는 앨라배마의 정치색은 ‘완전 레드’라 할 수 있다. 1988년 대선 이래 한 번도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적이 얻은 적이 없으며, 득표율도 거의 30% 차이가 날 정도로 공화당 세가 강한 곳이다. 주지사 선거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민주당 표도 30% 중반대가 나오긴 하는 데, 이는 앨라배마의 흑인 인구 비율이 미국 내 평균보다 훨씬 높은 3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백인들은 거의 90%대가 공화당, 흑인들은 98%가 민주당을 찍는 식으로 패가 갈리는 극단적인 진영별 투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인종 문제에 관해서는 남부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KKK단의 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인종차별 행태들이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노골적으로 자행된 지역이기도 했다.
셀마 대행진
셀마(Selma)는 앨라배마 서부에 위치한 인구 2만 명가량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셀마는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노예 해방이 시행된 지 한 세기가 지난 1965년도에도 여전히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던 흑인들이 셀마에서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까지 세 차례에 걸쳐 행진하며 인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불리는 1965년 3월 7일의 1차 행진에서는 6백여 명의 시위대들이 80번 고속도로를 따라 셀마에서 몽고메리 주의회 의사당까지 87km 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곤봉 등으로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백인 주경찰대에 의해 무차별 구타와 함께 최루가스 공격을 받아 도중에 저지되고 말았다.
이틀 뒤 벌어진 2차 행진은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진행됐다. 두 번째 행진에는 시위대가 늘어 약 2,500명가량이 참여했으며, 흑인 시위에 동조해서 참여했던 백인들 가운데 한 명이 같은 백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셀마 지역의 병원들은 그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그는 이틀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3월 25일에 시작한 세 번째 행진은 참가자 수가 2만 5,000여 명으로 대폭 늘어난 가운데, 결국 몽고메리 시내 주의회 청사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날 행진은 연방정부의 지휘를 받는 주 방위군들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고, 시위대들은 앨라배마의 인권 탄압 실상을 만천하에 알렸다.
셀마에서 있었던 유혈 행진은 미국 흑인 인권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Comments